1. 세계속 장미 와 역사 그리고 형태
장미는 장미과 장미 속에 속하는 관목의 총칭이다. 장미 속은 장미 아과에 단형 족인 장미족에 속하는 유일한 속입니다.
장미의 분포는 야생종 장미는 주로 북반구의 온대와 한대 지방에 분포합니다. 오늘날 장미는 야생종 사이의 잡종이거나 그 개량종으로, 주로 향료용 나 약용으로 재배되어 오다가 10세기 전후로 관상용으로 개량하여 재배하게 된 원예 종입니다.
장미의 형태는 장미의 잎은 어긋나기를 하고 보통 홀수 깃꼴 겹잎을 이루지만 홑잎인 것도 있으며, 턱잎이 있습니다.
꽃은 줄기 끝에 단 생화서나 산방화서로 피며, 홑꽃은 꽃잎이 5개지만 원예종 가운데에는 홑꽃 이외에 겹꽃, 반 겹꽃을 이루는 것이 많습니다.
장미의 대표적 특성 중 하나는 가시인데, 가시는 줄기의 표피세포가 변해서 끝이 날카로운 구조로 변형된 것입니다.
장미의 역사는 세계의 장미 재배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습니다. 고대 이집트, 고대 바빌로니아, 고대 페르시아, 고대 중국 등 여러 지역에서 여러 가지 종류의 장미가 재배되었다는 사실이 벽화로도 남아있습니다. 관상용으로 재배되기는 약 3천년 이상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최초의 장미의 벽화는 1900년 영국의 고고학자 아서 에번스가 발견한 것으로, 크레타섬을 탐사할 당시 기원전 2000-1700년 사이에 건축된 크노소스 궁전을 발굴하면서 발견하였습니다. 장미에 대한 첫 번째 그림은 프레스코입니다. 그 그림을 그린 화가는 5장이 꽃잎이 달린 페니키아 장미를 그대로 그리지 않고, 6장의 꽃잎에 중심부가 오렌지색은 황금빛 장미를 그렸습니다. 장미는 기원전 야생의 장미가 향료나 약용으로 채취하다가 차츰 실용적인 측면과 관상용으로 재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 시대에는 시인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 장미에 관한 형용사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장미에 관한 역사 이야기는 영국의 장미전쟁이 특히 유명합니다. 이 전쟁의 이름은 왕위를 다투던 요크 가와 랭커스터 가가 제각기 흰 장미와 붉은 장미를 달고 30년 동안 전쟁을 지속했습니다. 결국 양가가 흰 장미와 붉은 장미를 섞은 통일 문장을 만들면서 이 분쟁이 해결되었다는 것에 유래합니다.
사철 피는 유럽의 장미가 등장한 것은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패권을 쥔 이후이며, 특히 화려한 대륜의 사철 피는 장미를 프랑스의 장미원에서 만들어낸 것은 19세기 후반이었습니다. 18세기 이전의 장미를 19세기 이후의 장미를 현대 장미라 합니다. 그리고 장미는 사람과도 많은 역사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클레오파트라는 장미 향수, 장미 목욕 등 생활 속에서 많은 장미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녀는 안토니우스가 자신을 만날 때 본 수많은 장미 잎으로 인해 자신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장미 냄새를 맡을 때마다 자기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거처를 장미 잎으로 가득 채우곤 했습니다. 특히 연인인 안토니우스가 참석하는 연회 때에는 당시 금액으로 1타랑으록 즉 현재 미화로 13,000달러를 들여 마룻바닥에 약 1m 높이의 장미를 깔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훗날 클레오파트라에게 빠진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하여 죽을 때, 자신의 무덤에 장미를 뿌려 달라고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두 번째로 네로 같은 경우는 축하연 때에는 장미로 목을 장식하고 장미 관을 썼습니다. 장미 꽃잎으로 채운 베개서 자고 있는 것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네로는 마루에도 장미를 뿌려 놓고 생활했으며, 분수에서는 장미 향수가 뿜어 나오도록 했습니다. 네로의 연회에 쓰이는 술에는 장미 향이 들어 있었으며, 디저트에는 장미 푸딩이 나왔다고 합니다. 축하연에서는 손님들이 장미 향수를 섞어 놓은 풀장에서 마음 놓고 수영을 할 수 있었고, 네로는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15만 달러 상당의 장미를 소비했다고 합니다.
세 번째로 로마인들은 장미를 재배해서 로사 겔리 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신랑 신부들은 장미 관을 쓰기도 했으며, 로마의 귀족 여자들은 장미꽃을 찜질 약으로 사용하면 주름을 없애 준다고 믿었으며, 거의 화폐로 사용하다시피 했습니다. 장미 용액이 취기를 없애 줄 것이라는 생각에 포도주를 마실 때 잔에 띄우기도 하고, 전쟁에 승리한 군대는 거리의 발코니에 모인 군 중들로부터 장미 꽃잎 세례를 받았으며, 또 장미는 영원한 생명과 부활을 나타낸다고 생각해서 장례식에 사용되거나 묘지에 재배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에 시작된 천장부터 늘어뜨린 장미 아래서 주고받은 이야기는 절대적으로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관습이 오늘날까지 전해 오고 있습니다.
2. 동아시아의 장미와 역사
동아시아의 장미 경우는 서양 장미가 도입되기 전까지 장미라는 말은 장미 속의 찔레꽃, 해당화, 월계화 등을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한국의 역사 속에서 장미를 찾아보면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언급되었습니다.
첫 번째 삼국사기는 제46권 열전 6 설 총 조를 보면, 신이 들으니 예전에 화광이 처음 들어 왔을 때, 향기로운 꽃동산에 심고 푸른 장막으로 보호하였는데, 봄이 되어 곱게 피어나 온갖 꽃들을 능가하여 홀로 뛰어났습니다. 이에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에 이르기까지 곱고 어여쁜 꽃들이 빠짐없이 달려와서 혹시 시간이 늦지나 않을까 그것만 걱정하며 배알하려고 하였습니다. 홀연히 한 가인이 붉은 얼굴, 옥 같은 이에 곱게 화장하고, 멋진 옷을 차려입고 간들간들 걸어 와서 얌전하게 앞으로 나와서 말했습니다. '첩은 눈같이 흰 모래밭을 밟고, 거울같이 맑은 바다를 마주 보며, 봄비로 목욕하여 때를 씻고, 맑은 바람을 상쾌하게 쐬면서 유유자적하는데, 이름은 장미라고 합니다. 왕의 훌륭하신 덕망을 듣고 향기로운 휘장 속에서 잠자리를 모시고자 하는데 왕께서는 저를 받아 주시겠느냐고 하였는데 이때의 장미는 아름다운 여인의 이름이나 장미와 모란을 비교한 것으로, 장미가 이미 들여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고려사에는 한림별곡의 일부 가사를 소개한 내용 중에 홍 모란, 백모란, 정홍 모란, 홍 작약, 백작약, 정홍 작약, 어류 옥 매, 황색 장미, 자색 장미, 지지, 동백이 사이사이 꽃 핀 광경은 어떠한가 라는 대목이 있어서 장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선시대에는 조선왕조실록에도 수없이 등장할 뿐만 아니라 양화소록에서도 가오라 하여 화목 9 품계 중에서 5등에 넣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서양 장미는 8·15광복 후에 유럽 · 미국 등지로부터 우량종을 도입한 것으로 지금은 다양한 원예종을 재배하고 있습니다.
또 한 원예종은 거의 세계 모든 나라에서 재배합니다. 재래종 장미를 재배하던 한국에는 19세기 후반, 미국과 유럽에서 서양 장미가 들어왔습니다. 이후 다채로운 재래종과 원예종의 장미를 재배하고 관상하게 되었습니다.